「친일 행위 구명법」이란, 간단하게 말하면 일본 통치 시대에 일본에 협력한 매국노를 세상에알리자 고 하는 법률입니다.
이 법률에는 몇개의 문제점이 있습니다. 우선 선조의 행동을 자손이 갚아야할 것인가라고 하는 문제. 자손의 죄는 묻지 않는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만, 선조에게 친일파가 있다고 알면 그 토지에서는 살아갈 수 없게 될 것이 예상됨니다. 또, 친일파 자손의 재산을 몰수하자고 주장하는 세력도 있습니다.
2, 이 법률은 사후법(사실이 먼저 있고, 그것을 재판하기 위한 법률이 후에 성립한 상태)인 것. 특히 이 번 경우와 같이 사망하고 없는 경우, 변명하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몹시 불공평한 법률입니다.
3, 과거와는 언제부터 언제까지를 가리키는지, 그것이 명기되어 있지 않다. 확대 해석해 향후 일한 관계가 악화되었을 경우, 현재 일한 우호를 추진하고 있는 인물도 이 법률로 규제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는 것.
4, 당시는 대부분의 사람이 친일이었다고 하는 사실. 일본 통치로 신분제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비지배자층인 평민, 노예, 백정은 일본의 통치를 환영했습니다. 지배되는 측에서 보면 지배자가 누구이어도 관계 없습니다. 일본 통치로 인프라는 정비되어 공부의 기회가 주어져 신분제가 폐지되어 법률상만으로도 차별되지 않게 된이유 때문에 싫어 할 리가 없습니다. 만약 엄밀하게 친일파를 찾으면 대부분의 한국인은 친일파의 자손이라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한국인의 누구나가 자기 자신이「친일 행위 구명법」로 규제될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일본에 협력한 것은 일부의 사람으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학대를 받았던 것이라고 완고하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남는 자료를 엄밀하게 조사하면, 오히려 조선인은 협력적이었 것이 알려질 뿐입니다. 일본측에서는 이법이 제정된 당초부터「진심으로 과거를 청산했다면 곤란한 것은 오히려 한국인일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나라당은 신기남 의장의 친아버지가 한국 독립 이전에 일본군헌병으로서 근무하고 있었던 것이 밝혀졌던 것에 대해 신 의장의 책임론을 주장했다.
신·기남 의장은 , 친아버지가 일제 시대에 일본군으로서 근무했다고 하는 월간지「신동아」의 보도와 관련해, 「아버지는 일제 시대, 대구 사범 학교를 졸업해 교사 생활을 보낸후 군에 입대했다고 듣고 있다라고 일본군에의 복무 사실을 인정했다.
신 의장은 이 날, 부산을 방문해 기자들에게 이와 같이 밝혀, 「일제 치하에서 군생활을 보냈던 것이 아버지로서는 자기 나름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이해하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생명을 걸어 싸운 독립 투사와 유족에게는 아버지 대신에 사죄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일본 통치 시대, 신 의장의 아버지로부터 고문 받았다
일본 통치하에서 일본 헌병으로서 복무한 신 의장 아버지, 신상묵(시게미트·쿠니오는 창신개명) 씨한테서, 항일 독립 운동을 해 체포된 후, 심한 고문과 조사를 받았다는 증언이 나왔다.
체씨는「진해 헌병대 유치장에서, 다른 한국인 헌병 대원 1명과「시게미트」라고 하는 명찰을 붙인 일본군하사 위의 계급인 군조 계급의 한국인으로부터, 심한 고문을 받았다」라고 해, 「사진과같은 고문」라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체씨는 이 때, 좌각을 부상해, 지금도 후유증에 괴로워하고 있다고 한다.
또, 체씨와 함께 비밀 결사대를 결성하고 항일운동을 실시한 김 원장은, 「체포된 후, 당시의 조사관 이었 헌병 군조가「 나는 한국인이다. 대구 사범 학교를 나왔다 라고 이야기했으므로, 한국인인 것을 알았다 라고 해, 「당시 그 헌병 군조의 명찰을 보았지만, 시게마트·쿠니오라고 쓰여져 있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김 원장은「당시 , 1개월 이상이나 조사를 받으면서, 거꾸러 매달려 목검으로 맞았다. 또, 알몸으로 되어 하루종일, 자갈 위에 무릎을 꿀려 앉혀졌다」라고 분명히 했다.
2004.08. 18 15:28
「어쩔 수 없이」라고 신 의장이 얘기한 한 것에 대해서.. 이렇게 명백한 고문의 증언이 나온되는 , 어떻게 변명할려는지.... 이 피해자 증언이 사실이라고 하면, 일본측의「잔학행위를 한 것은, 일본군 으로 고용해진 현지의 조선인였다. 라는 일본의 주장이 증명된 일로도 됩니다.
당시 항일 활동을 하고 있던 것은, 공산주의자와 일본 통치로 이권을 잃은 양반 이었습니다. 일본 통치는 매우 온화한 것으로, 대만에 비교한다면 조선은 당시꽤 협력적인 것이었던 것이다.
덧붙여서 반일 선전에 사용되고 있는 첨부한 독립 기념관의 고문 하는 일본 헌병의 사진은 , 바로 신 의장 부친에 모습이었던 것 입니다.
실은 확인을 위해서 기자가, 대구 사범 대학을졸업한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놀랄 만한 일로 신 의장의 부친을 분명히 기억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는 것이 허기자의 설명이다.
"일본 점령기, 대구 사범 대학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생활을 했기 때문에 사이가 좋았다. 기사(신동아 9월호)로 실명으로 증언한3명은. 증언을 통해서 조선 총독부 기관지이었던''매일신보''에 신 의장의 부친 기사가 실렸다고 하는 사실이 있다고 전했다.
기자가 확인한 1940년 11월 8 날짜''매일신보''에는 신 의장의 부친''시게미트·쿠니오''로 창신개명 해, 대구 사범 대졸업 후, 화순 청풍 초등학교 교사를 해 조선 총독부 국군병 지원자로 훈련소에 입대했다고 것이 쓰여져 있다.
신 의장의 부친이 군인이 된 1940년, 이례적으로 천명 남짓의 일본군모집에"8만명여의 조선인"이 지원했다. 일본은 이 사실을 대대적인 홍보 수단으로 이용, 조선 총독부 기관지이었던''매일신보''와''경성 일보''에 합격자 명부를 게재했다. .
"당시 엘리트 집단에 인식된 대구 사범 대학출신으로 교사까지 근무한 신 의장의 부친이 장교도 아닌 일반 군인에 지원했다고 하는 사실은 충분한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상황을 분석한 허기자는"매일신보로부터 특별 케이스로 신 의장의 부친 이야기를 특집 기사로 취급해 자세하게 보도했지만, 일본의 체제 홍보에 이용된 예다"라고 말했다.
특히 대구 사범 대학출신 교사는 당시 교무실에서 직접 신문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신 의장의 부친의 기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이 있다고 하는 분석도 덧붙였다.
사실, 신 의장의 부친의 친일 행적에 대한 이야기는 신동아 9월호로 보도하기 전부터 인터넷을 통해서 확산되어있다.
신 의장의 미국 방문 직후, 진보 진영 넥 워크''진보누리''인터넷 게시판에"사범 학교 출신으로 일본계 간부를 역임하고 있는 도중 해방, 이후 미군정으로 경찰 간부로 재채용이 된 후 공비를 토벌 했다고 하는 신 의장의 부친은 친일파가 아닌가? "그렇다고 하는 문장이 실린 것.
기사의 내용은 일본이 공보에 이용했다(일본이 나쁘다)라고 하는 논조입니다만, 주목 해야 할 것은 1000명의 모집에 8000명의 응모가 있었다고 하는 사실. 8배의 배율입니다. 이 응모자는 물론 강제당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 고배율을 돌파해 헌병대에게 들어온 신 의장의 부친은 아마 엘리트일 것입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1000명이나 현지 채용하는 것은, 착취할 뿐이었다고 하는 한국측의 주장과 크게 동떨어집니다. 일본의 식민지 경영은 투자 경영형. 구미는 착취 약탈형였습니다. (덧붙여서 반도는 병합이고, 식민지는 아니다 라고 생각)현지 고용으로 책임을 갖게하고 학교를 만들어 지식을 주어 적극적으로 교육했습니다. 과거를 청산해, 일본의 악행을 폭로해 일부 친일파를 재판할 생각의 친일 규제법. 그러나 일부는 커녕 헌병대 모집에 8000명이나 응모해, 악행은 커녕 일본이 현지 거주자를 평등하게 취급했던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첨부사진) 당시의 수상이었던 오오쿠마 시게노부에게, 우수하다고 유익 표창된 일본 헌병 대원들 (한국명으로 표창되었읍니다.)
일본과 손잡고 날뛰다가 일본 망하니까 고무신 거꾸로 신고.. 반일 교육하여 과거 은페하고,미국이 독립시켜주니까..이제와서...물러가라고 반미 구호 외치고 중국 무시하고....그지겨운 파벌싸움 지금까지 계속 하고 있는 대한민국... 일본이 전쟁후 한국에 많은 지원 (기술지원 포함)
어렵게 개발한 기술을 제공 하라고....일본은 과거 우방국으로 같이 손잡고 대동화전쟁을 해준 은혜로 생각 하고 지원을 해왔는데 한국에 정치가들이라는 놈들은 일본에 사죄에 댓가라고..공공연히 떠들고 ....
친일파중에 친일파들은 해방후 반일파로 변신... 배신에 배신을 거듭하며 이땅에 존속 하고 있는 것 입니다
댓글 3개:
「친일 행위 구명법」을 만든 신 기남의장의 아버지도 친일파이었다!
「친일 행위 구명법」이란, 간단하게 말하면 일본 통치 시대에 일본에 협력한 매국노를 세상에알리자
고 하는 법률입니다.
이 법률에는 몇개의 문제점이 있습니다.
우선 선조의 행동을 자손이 갚아야할 것인가라고 하는 문제. 자손의 죄는 묻지 않는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만, 선조에게 친일파가 있다고 알면 그 토지에서는 살아갈 수 없게 될 것이 예상됨니다. 또, 친일파 자손의 재산을 몰수하자고 주장하는 세력도 있습니다.
2, 이 법률은 사후법(사실이 먼저 있고, 그것을 재판하기 위한 법률이 후에 성립한 상태)인 것. 특히 이 번 경우와 같이 사망하고 없는 경우, 변명하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몹시 불공평한 법률입니다.
3, 과거와는 언제부터 언제까지를 가리키는지, 그것이 명기되어 있지 않다. 확대 해석해 향후 일한 관계가 악화되었을 경우, 현재 일한 우호를 추진하고 있는 인물도 이 법률로 규제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는 것.
4, 당시는 대부분의 사람이 친일이었다고 하는 사실. 일본 통치로 신분제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비지배자층인 평민, 노예, 백정은 일본의 통치를 환영했습니다. 지배되는 측에서 보면 지배자가 누구이어도 관계 없습니다. 일본 통치로 인프라는 정비되어 공부의 기회가 주어져 신분제가 폐지되어 법률상만으로도 차별되지 않게 된이유 때문에 싫어 할 리가 없습니다. 만약 엄밀하게 친일파를 찾으면 대부분의 한국인은 친일파의 자손이라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한국인의 누구나가 자기 자신이「친일 행위 구명법」로 규제될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일본에 협력한 것은 일부의 사람으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학대를 받았던 것이라고 완고하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남는 자료를 엄밀하게 조사하면, 오히려 조선인은 협력적이었 것이 알려질 뿐입니다.
일본측에서는 이법이 제정된 당초부터「진심으로 과거를 청산했다면 곤란한 것은 오히려 한국인일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나라당은 신기남 의장의 친아버지가 한국 독립 이전에 일본군헌병으로서 근무하고 있었던 것이 밝혀졌던 것에 대해 신 의장의 책임론을 주장했다.
신·기남 의장은 , 친아버지가 일제 시대에 일본군으로서 근무했다고 하는 월간지「신동아」의 보도와 관련해, 「아버지는 일제 시대, 대구 사범 학교를 졸업해 교사 생활을 보낸후 군에 입대했다고 듣고 있다라고 일본군에의 복무 사실을 인정했다.
신 의장은 이 날, 부산을 방문해 기자들에게 이와 같이 밝혀, 「일제 치하에서 군생활을 보냈던 것이 아버지로서는 자기 나름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이해하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생명을 걸어 싸운 독립 투사와 유족에게는 아버지 대신에 사죄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일본 통치 시대, 신 의장의 아버지로부터 고문 받았다
일본 통치하에서 일본 헌병으로서 복무한 신 의장 아버지, 신상묵(시게미트·쿠니오는 창신개명) 씨한테서, 항일 독립 운동을 해 체포된 후, 심한 고문과 조사를 받았다는 증언이 나왔다.
체씨는「진해 헌병대 유치장에서, 다른 한국인 헌병 대원 1명과「시게미트」라고 하는 명찰을 붙인 일본군하사 위의 계급인 군조 계급의 한국인으로부터, 심한 고문을 받았다」라고 해, 「사진과같은 고문」라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체씨는 이 때, 좌각을 부상해, 지금도 후유증에 괴로워하고 있다고 한다.
또, 체씨와 함께 비밀 결사대를 결성하고 항일운동을 실시한 김 원장은, 「체포된 후, 당시의 조사관 이었 헌병 군조가「 나는 한국인이다. 대구 사범 학교를 나왔다 라고 이야기했으므로, 한국인인 것을 알았다 라고 해, 「당시 그 헌병 군조의 명찰을 보았지만, 시게마트·쿠니오라고 쓰여져 있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김 원장은「당시 , 1개월 이상이나 조사를 받으면서, 거꾸러 매달려 목검으로 맞았다. 또, 알몸으로 되어 하루종일, 자갈 위에 무릎을 꿀려 앉혀졌다」라고 분명히 했다.
2004.08. 18 15:28
「어쩔 수 없이」라고 신 의장이 얘기한 한 것에 대해서.. 이렇게 명백한 고문의 증언이 나온되는 , 어떻게 변명할려는지....
이 피해자 증언이 사실이라고 하면, 일본측의「잔학행위를 한 것은, 일본군 으로 고용해진 현지의 조선인였다. 라는 일본의 주장이 증명된 일로도 됩니다.
당시 항일 활동을 하고 있던 것은, 공산주의자와 일본 통치로 이권을 잃은 양반 이었습니다. 일본 통치는 매우 온화한 것으로, 대만에 비교한다면 조선은 당시꽤 협력적인 것이었던 것이다.
덧붙여서 반일 선전에 사용되고 있는 첨부한 독립 기념관의 고문 하는 일본 헌병의 사진은 ,
바로 신 의장 부친에 모습이었던 것 입니다.
실은 확인을 위해서 기자가, 대구 사범 대학을졸업한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놀랄 만한 일로
신 의장의 부친을 분명히 기억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는 것이 허기자의 설명이다.
"일본 점령기, 대구 사범 대학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생활을 했기 때문에 사이가 좋았다. 기사(신동아 9월호)로 실명으로 증언한3명은. 증언을 통해서 조선 총독부 기관지이었던''매일신보''에 신 의장의 부친 기사가 실렸다고 하는 사실이 있다고 전했다.
기자가 확인한 1940년 11월 8 날짜''매일신보''에는 신 의장의 부친''시게미트·쿠니오''로 창신개명 해, 대구 사범 대졸업 후, 화순 청풍 초등학교 교사를 해 조선 총독부 국군병 지원자로 훈련소에 입대했다고 것이 쓰여져 있다.
신 의장의 부친이 군인이 된 1940년, 이례적으로 천명 남짓의 일본군모집에"8만명여의 조선인"이 지원했다. 일본은 이 사실을 대대적인 홍보 수단으로 이용, 조선 총독부 기관지이었던''매일신보''와''경성 일보''에 합격자 명부를 게재했다. .
"당시 엘리트 집단에 인식된 대구 사범 대학출신으로 교사까지 근무한 신 의장의 부친이 장교도 아닌 일반 군인에 지원했다고 하는 사실은 충분한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상황을 분석한 허기자는"매일신보로부터 특별 케이스로 신 의장의 부친 이야기를 특집 기사로 취급해 자세하게 보도했지만, 일본의 체제 홍보에 이용된 예다"라고 말했다.
특히 대구 사범 대학출신 교사는 당시 교무실에서 직접 신문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신 의장의 부친의 기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이 있다고 하는 분석도 덧붙였다.
사실, 신 의장의 부친의 친일 행적에 대한 이야기는 신동아 9월호로 보도하기 전부터 인터넷을 통해서 확산되어있다.
신 의장의 미국 방문 직후, 진보 진영 넥 워크''진보누리''인터넷 게시판에"사범 학교 출신으로 일본계 간부를 역임하고 있는 도중 해방, 이후 미군정으로 경찰 간부로 재채용이 된 후 공비를 토벌 했다고 하는 신 의장의 부친은 친일파가 아닌가? "그렇다고 하는 문장이 실린 것.
기사의 내용은 일본이 공보에 이용했다(일본이 나쁘다)라고 하는 논조입니다만, 주목 해야 할 것은 1000명의 모집에 8000명의 응모가 있었다고 하는 사실. 8배의 배율입니다. 이 응모자는 물론 강제당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 고배율을 돌파해 헌병대에게 들어온 신 의장의 부친은 아마 엘리트일 것입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1000명이나 현지 채용하는 것은, 착취할 뿐이었다고 하는 한국측의 주장과 크게 동떨어집니다. 일본의 식민지 경영은 투자 경영형. 구미는 착취 약탈형였습니다. (덧붙여서 반도는 병합이고, 식민지는 아니다 라고 생각)현지 고용으로 책임을 갖게하고 학교를 만들어 지식을 주어 적극적으로 교육했습니다.
과거를 청산해, 일본의 악행을 폭로해 일부 친일파를 재판할 생각의 친일 규제법.
그러나 일부는 커녕 헌병대 모집에 8000명이나 응모해, 악행은 커녕 일본이 현지 거주자를 평등하게 취급했던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첨부사진)
당시의 수상이었던 오오쿠마 시게노부에게, 우수하다고 유익 표창된 일본 헌병 대원들
(한국명으로 표창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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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이라는게 당신은 아직도 자랑 스럽읍니까??
일본과 손잡고 날뛰다가 일본 망하니까 고무신 거꾸로 신고..
반일 교육하여 과거 은페하고,미국이 독립시켜주니까..이제와서...물러가라고 반미 구호 외치고 중국 무시하고....그지겨운 파벌싸움 지금까지 계속 하고 있는 대한민국...
일본이 전쟁후 한국에 많은 지원 (기술지원 포함)
어렵게 개발한 기술을 제공 하라고....일본은 과거 우방국으로 같이 손잡고 대동화전쟁을 해준 은혜로 생각 하고 지원을 해왔는데 한국에 정치가들이라는 놈들은 일본에 사죄에 댓가라고..공공연히 떠들고 ....
친일파중에 친일파들은 해방후 반일파로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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