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6. 15.

당신이 보기에...작전지도 보고 있는 일본군 장성이 강제 징병온 군인으로 보입니까?


댓글 3개:

MIYAKE :

모르는게 약일수도 있다........

사진에서 조선인을 고문하는 헌병은 다름아닌 조선인 헌병이다.

한국과 일본 사이의 과거에는 사실을 알고 싶지 않은게 몇가지 있다.
강제적인..창씨개명...강제 징용...등등...
물론 일본에 주장이 다올타는건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와
과연...우리에게...거짖없이 가르치었나..조금은 집고 넘어가야 할것이다.

재글을 잃기 전에 먼저 아레 사이트를 보아주길 바란다

http://honyaku.yahoofs.jp/url_result?ctw_=sT,eCR-JK,bF,hT,uaHR0cDovL25hbmRha29yZWEuc2FrdXJhLm5lLmpwL2h0bWwvdHlvdXNlbmhlaS5odG1s,qlang=ja|for=0|sp=-5|fs=100%|fb=0|fi=0|fc=FF0000|db=T|eid=CR-EJ,kfbd169935c65887ea8ac63a56e78984a,t20080616103810,




이것은 서울대 교수가 쓴 현대 한국인의 국민성...
사실은 20번까지 있으나 같은 한국인으로서 인정(납득)되지 않아 빼어 버렸다

「현대 한국인의 국민성격」저자: 이부영(서울 대학교수)
(1) 의존심이 강하다
(2) 해야 할것을 하지 않고 타인에게 기대해 배신당하면 원망하거나 비난 한다
(3) 상대도 자신과 같은 생각이라고 생각해「다르다」라고 알면 배신당했다고 생각한다
(4) 성급하고 기다리지 못하고「금방」이라고「오늘중」이라고 잘 말한다
(5) 금방 눈에 보이는 성과를 올리려하고 효과가 나오지 않으면 참지 않고 다른 일을 하려고 한다
(6) 계획성이 없다
(7) 자신의 주장뿐 타인의 사정을 생각지 않는다
(8) 허세의욕으로 허영심이 강하다
(9) 큰 것·화려한 것을 좋아한다
(10) 무슨일에 관하여크게 과장한다
(11)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12)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13)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하고 자신을 과시하지만 못했을때..아무러치 않게 생각한다
(14) 일은 적당하게 하고 목소리만 크다
(15) 면밀함이 없고 정확성이 부족하다
(16) “외모”에 신경을 많이쓴다
(17) 「세계 최고」하고「브랜드」에 약하다
(18) 문서보다는 말을더 믿는다.
(19) 원리·원칙보다 정에 약하여 모든걸 정에 호소하려고 한다




이것은 일제때,조선인 다루기 매뉴얼

조선군 사령부 1904~1945 코노 나오야 저국서 간행회 228 페이지로부터 발췌

조선병 다루기 수칙

1, 언제, 어떠한 때라도 고추가루를 식사에 좋아할만큼 배급.
1, 절대로 머리를 두드려선 안 된다. 원을 품고 복수하는 기질이 있고, 탈영의 원인이 된다.
1, 청결한 식사 운반용 물통과 걸레 물통의 구별을 잘 가르치는 것.
1, 위험한 상황에서는 총을 내던지고 울기 시작하는 버릇이 있으니까,
일본병 2명에 한명의 조선병를 넣어 행동하라.

MIYAKE :

한국의 특이한 역사관이라고 하는 것은, 그 건국의 사정에 얽혀 있다.
한국의 국정교과서「중학 국사·아래」에서는 다음과 같이 쓴다.

우리가 광복(JOG주: 독립)을 맞이할 수 있었던것은, 연합군의 승리가 가져와 준 결과에서도 있지만, 이전부터, 우리 민족이 일제에 저항해 끈질기게 전개해 온 독립 운동의 결실이기도 할 수 있다.

확실히 대동아전쟁 발발 당시에 샹하이에 있던「대한 임시 정부」
는, 일본에 대해서 선전포고를 했지만 그 뒤로도, 내부 항쟁을(당파싸움) 계속할 뿐이었다.

그 때문에「대한 임시 정부」는 미국에도 중국에도 승인하지 안았다.
적어도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에서의 레지스탕스와 같이 게릴라전이라도 하고 있었으면, 연합국의 일원이라고 인정될 가능성은 있었지만, 그것조차도 없었다.

패전시, 김구는 한국 광복군을 편성해, 훈련을 쌓고 있었지만, 일본 항복의 소식을 접하고, 하늘을 바라보며 긴 탄식과 함께,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일본군을 격멸 해 우리 동포를 해방하고 싶었다.

■ 2일간계양되고 내려진 태극기 ■

  8월 15일에 패전을 맞이하면서, 조선 총독부의 엔도 야나기사쿠·정무 총감은 조선어 신문「중앙 일보」사장·려운향과 만나, 모든의 통치 기구를 한국인의 자치 조직에 인도하는 것을 신청했다.

려운향은, 그 날 저녁, 스스로를 위원장으로 하는「조선 건국 준 비위원회」을 조직 하고, 총독부로부터 치안 유지의 권한을 인수해, 방송국이나 신문사등의 언론기관을 계승했다.

건물이라고 하는 건물에는, 「태극기」를 걸고.
그러나 연합군은 8월 16일에 총독부에 기밀 명령을 보내와, 당분간 조선 통치를 계속해 통치 기구를 보전한 채로 연합군에 인도하도록명령했다.

18일, 총독부는 부득이 행정권을 되찾았다. 태극기가 내려지고 다시 일장기가 내걸렸다.

■ 장외의 「조선인민 공화국」 ■

조선측은 격노했지만, 어찌할 바는 없었다.
려운향은 「조선 건국 준비위원회」의 지부를 만들고 서울에 1천명 남짓의 대의원을 모으고, 「조선인민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지만, 미소 양국은 이것을 무시했다.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때, 「조선인민 공화국」의 대표가 맞이하기위하여 인천항에 갔고 , 500명 정도의 조선인이 태극기를 내걸고 꽃다발을 가지고 미군에 접근하려했을때, 미군이 이를 착각 해 발포, 다수의 중경상자가 나오는 일이 있었다.

9월 9일, 미국측은 오키나와 제 24 군단 홋지 중장, 제57 기동부대 사령장관 킨케이드 대장, 일본측은 조선 총독·아베 노부유키 대장,
조선군관할구역 사령관·코우즈키 요시오 중장과의 사이로,
휴전 협정이 연결되었지만, 조선측은 이협정 어디에도 낄수 없었다.

당시,루즈벨트 대통령은 야르타 회담에서, 한반도는 독립시키지 않고,
연합국에 의한 신탁통치로 해, 그 기간은 20년부터 30년 정도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 일본과 함께 대동아전쟁을 싸운 조선 ■

왜 미국은 이 정도로 철저히 조선 독립 세력을 무시했는지?
그이유에는 먼저,한민족으서 국가를 운영해 나갈 준비가 되어있는지, 라고 하는 의문이 있었다.

현실적으로「광복」 후도 조선 독립의 리더들은 내부 항쟁만 일삼고 있었다.
려운향도, 그 정적이었던 송진우도, 그리고 김구 자신도, 내부 항쟁 에서 암살되고 있었다. (당파싸움.내부항쟁은 한국인의 오랜 고질병)

하나 더, 한민족이 전쟁중에 보인 태도, 일본과 일심일체가 되어 싸웠던 자세이다. 그 필두로는 일본의 육군 사관 학교를 나오고, 눈부신 활약을 한
군인들이다. 우선 육군 중장까지 승진한 홍사익. 일본인 부대를 인솔해 발군의 훈공을 세워 군인으로서 최고의 명예의 금치훈장이 수여된 주석원·육군 대령. 전후,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육군 사관 학교를 나오고, 패전시는 만주국군중위이었다.

이러한 조선인의(일본군) 대활약에 자극받은 조선인은, 1944년에는 6천 3백 명의 지원병 모집에 대해서, 실로 30만명 이상의 청년이 응모해, 배율은 48배에 도달했다. 혈서에 의한 탄원도 수백 인에 달해, 희망을 넣지 못하고 자살까지 한 청년도 나타나, 총독부를 곤혹시켰다.

대동아전쟁에 군인·군속으로서 출정 한 조선 청년은 합계 24만명에 달하고, 그중 2만천명이 사망.

위패가 현재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지고 있는 사람들중에는 조선 출신자면서 특공 전사 김 히사시필등 14명,
전후에 일본 군인들과 함께 인도네시아 독립군에 몸을 던진 대들보7별,
보복 재판으로 전쟁범죄인으로서 처형된 군인, 군속 147명등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확실히 일본의 군인과 같은 비극을 모두 걸었던 것이다.

일본은 전쟁 협력을 위해 한국의 인적·물적 자원의 수탈에 광분 했다」라고 한국의 고교 국사는 쓰지만, 눈에 띈 반란도 테러도 게릴라 활동도 스트라이크도 없었고, , 그것을 모두 일본 군국주의의 강제에 의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은 사실로서 어렵다.

미국에서 봐도, 한민족은 일본과 일체가 되어, 전쟁에 매진 하고
있다고 보였을 것이다. 그러한 민족을 분리 독립시켜서, 연합국에게 좋게 행동할 리가 없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울 것이다.

루즈벨트가 2, 30년의 신탁통치를 생각했던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연합군과 반대로, 조선 총독부가(일본) 미국의 점령전에 당황해서 조선을 독립 시키려고 했던 것도, 조선에대한 일본의 생각은,이모두 일본과 함게 싸워 온 동포로서의 신뢰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미국에서 주어진 독립 ■

1945년 12월, 미국과 영국 소 3국은 모스크바에서 외상회의를 열어, 조선의 독립은 당분간 인정하지 않고, 5년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남북으로.....
당연히, 조선인의 상당수는 이것에 반발했지만, 북쪽의 김일성등 공산주의자가 소련의 기대에 따라서 신탁통치안에 찬성했다.

미소는 독립 정부 수립을 담당해야 할 단체의 선정으로 대립해, 미국은
1947년에 이 문제를 유엔에 반입하고, 유엔 감시하에서 남북 동시 선거를 실시해, 독립 정부를 수립하는 것으로 했다.

그러나, 소련은 유엔 감시단의 북한 방문을 인정하지 않고, 남조선만의 선거가 되고,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설립되었다.
이것에 대항하여, 북쪽에서는 9월 9일에「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결국, 한국이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 전쟁에 이겨 일본
의 통치를 뒤집어, 3년간의 군정중에, 소련에 대항해 유엔 감시하에서 선거를 실시하게 했다고 하는 경위에 의한다.
「광복」은 미국에서 주어진 것이며「우리 민족이 일제에 저항해 끈질기게 전개해 온 독립 운동의 결실」이라고 하는 역사 사실은 어디에도 눈에 띄지 않는다.

■ 반항기를 가질 수 없었던 한국 ■

한국 독립의 경위는 인도나 인도네시아와는 그야말로 대조적 이다.
인도의 체드라·보스는, 일본군의 협력 아래, 영국군으로부터 투항해 온 인도병을 모으고, 수만인 규모의 자유 인도군을 창설해, 일본군과 함께 인도 해방을 목표로 하는 인 펄 작전을 감행 했다.

일본 패전 후, 영국이 자유 인도군에 참가한 약 2만명의 장병을 반역죄로 재판에 회부하려고 하면, 인도 전 국토에서 반영 활동이 전개되어 수천인의 사상자를 냈지만, 2년간의 싸움 끝에, 독립을 거두었다.

인도네시아도, 독립파 지도자 수카르노, 핫타를 중심으로,
일본군의 지도 아래, 3만 5천의 장병으로부터 인도네시아 의용군을 창설해, 일본 패전 후는 이것을 핵심으로서 재침략하려고 하는 네델란드군과 4년 5개월이나 싸워, 80만명의 사망자를 내면서, 독립을 차지했다.

인도도, 인도네시아도, 스스로 독립을 차지했다고 하는 엄
연인 역사 사실이 있어, 그것을 그대로 역사 교육으로 가르치면, 아이들은 조국에 자랑과 애착을 안가질수없다.
독립국으로서의 자각을 가지려면 , 일종의「반항기」가 필요하고, 인도나 인도네시아도 충분한 이런 반공기를 가졌기 때문에, 현재는 영국, 네델란드와 당당하게 교류를 하고 있는것이다.

그에 대한 한국의 경우에는「독립은 미국으로부터 ...」 국가의 체면이 설수없다.

그러니까 일제 시대가 얼마나 심했는지, 그에 대한 한민족이 얼마나 영웅적으로 싸웠는지를 강조해,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무슨일 있을 때마다 일본 정부로부터의 사죄를 끌어 내어, 국민에게 나타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항일」을 국가의 자존심「등뼈」로 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 한국 전쟁에 관해서 사죄하지 않아도, 한국 매스컴이 떠들지 않는 것은, 국가의「등뼈」에 관계없기 때문이다.
또 사죄 요구를 해도,쌀쌀하게 거부되면, 오히려 한국 정부의 체면만 구기는 사정도 있다.

■ 경의와 위령과 감사와 ■

한국의 대일 사죄 요구와 반일 역사 교육은, 이러한「한국 의 속사정」에 의하는 것이고, 역사 사실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정치적 허구가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일본에 의한 조선 통치를 어떻게 평가할까. 한국에서도 일본
통치 시대의 역사 사실에 근거하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어 경제사 분야에서는 재평가파가 연구자의 3분의 1을 차지해 국사 분야에서도 동요가 일어나고 있다.
일본 통치 시대의 GDP 성장률은 4.15%과 당시의 선진국
을 웃돌아, 인구도 2. 4배가 될 정도의 고도 성장을 하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이 있으니까, 객관적인 연구를 하면, 재평가파가 증가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고도 성장에 관해서는 일본측의 공헌은 물론이고, 한민족의 노력과 능력에의 경의가 표해져도 마땅할 것이다.

2번째로 대동아전쟁으로 일본과 조선이 일체가 되어 싸운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여야하나. 일본인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할 때 , 거기에 함께 모셔지고 있는 조선인 2만 1천여주, 대만인 2만 8천여주에의 위령도 잊어서는 안된다.

제3에 한국 전쟁을 일본으로서 어떻게 평가할까. 이 전쟁으로 한국
국측이 지고, 북한과 같은 테러 국가가 지금의 몇배의 국가 규모로 버티고 있다면,
일본의 평화와 번영은 중대한 위협을 받고 있었을 것이다. 한국군이 42만명의 고귀한 희생을 내면서도, 과감하게 싸워 준 일에 대한 감사를 일본측은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역사 사실을 직시 하면, 일본인이 안아야 하는 것은,
한민족에 대한 경의와 위령과 감사의 정이다.

한국측의「항일 사관」에 대해,
일본측이 겉에서는 사죄하면서, 뒤에서는 반발한다는 것은,
역사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허구의 관계이며,
거기에서는 진정한 상호 이해도 우호도 자랄 수 없다.

일본측은「경의와 위령과 감사」을 표명해, 한국측도 역사 사실에 근거한 자신과 자랑을 확립한다, 하는 것이 진정한 화해에의 길일 것이다.

MIYAKE :

그리고....또하나 믿기실은 사실은 일본에 반한파는...일본으로 일찌감치귀하한 조선인(한국인이라는 사실)이라는 사실 이들은 철저히 일본인이되어 일본을 배신한 한국에 등을 돌리고 지금 일본인으로서 한국을 까고
있는것이다.

실제로 일본에 정계에는 한국계 일본인이 다수 있고...한국에 퍼주기파와....정반대 한국 까기파가 있다는것 이다.

수년전 일본에 거품경제가 무너지고 자살한 아라이(新井) 국회의원은
한국계 일본인 이다(일제때 박씨성의 한국인이 창씨개명때 만든 성이 新井... 新井= 朴)

일제때,일본인이 조선인을 깔보았던건 사실이다.
앞에서도 섰지만은..

조선병 다루기 수칙

1, 언제, 어떠한 때라도 고추가루를 식사에 좋아할만큼 배급.
2, 절대로 머리를 두드려선 안 된다. 원을 품고 복수하는 기질이 있고, 탈영의 원인이 된다.
3, 청결한 식사 운반용 물통과 걸레 물통의 구별을 잘 가르치는 것.
4, 위험한 상황에서는 총을 내던지고 울기 시작하는 버릇이 있으니까,
일본병 2명에 한명의 조선병를 넣어 행동하라.

3번에서 볼수있는 수칙에서, 당시의 조선인(한국인)에 수준이(샐활수준.문명도..)엿보인다.

지금 한국인이 못사는 동남아시아 의 사람들을 깔보는 그런 분위기 였다고 생각 한다.
실체로 일본이 필리핀을 점령했을때 가장 잔혹한 횡포를 부린것은 조선인 일본병 이었다는
증언도 있다.


그리고 한가지 일본인에 대부분은 지금에 천황과 일본에 일장기 그리고 애국가(기미가요)를
거부 한다. 일본 학교의 입학식 졸업식에 일장기 않걸기 기미가요 재창 않하기가
학교장 학생 학부모가 일치하여 자발적으로 하고 있다 일부 학교장이 일장기 계양과 기미가요 열창을 강요하면 등교거부 식 불참가등..급기야 최근 법으로 국기게양과 애국가 열창을 의무화하는 일까지 벌어젓다..
한국인이 들으면 의야할것 이다..(한국언론은 보도하지 않음)

일장기 그리고 애국가(기미가요)를거부 하는 이유는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일본인에게는 지난 과거 일부 국부(세계정복의 야욕을 가진군인)가 국민을 기만 하여
천황을 앞세워(꼭두가시) 일장기 그리고 애국가(기미가요)를 네세워 대일본제국이라는 이름에 아들과 딸들을 전쟁처에 희생한 뼈아픈 과거가 여기에 있기 때문 입니다.

대동아전쟁은 일본국민들에게도 군부에 속아한 나쁜전쟁이라고 생각 하고 있읍니다
그 나쁜전쟁에 일장기 그리고 애국가(기미가요)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일본인에게는
큰 애착심이 없는것 입니다..


이러한 연후로 일본이 패전을 해도 조선인은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해서 일본에
살수 있었던 것 입니다. 억지로 끌려왔다면 ??? 패전후 한국인이 말한대로 일본인이 포악하고 무조건 조선인을 괴롭혔다면 만약,당신같으면...그악날한 일본소굴에서 살맘이 생겼을까요? 아마 다음날로 짐싸서 한국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와서 억지로 끌려온것도 원통한데 외국인 차별이다 뭐다...말많으것도
재일동포 입니다
한국에 외국인 차별은 일본과는 비교도 않됨니다 외국인뿐만이 아니고 저같은 외국영주자도
외국인과 동일한 대접을 받읍니다
선거 못하고,,한국에 장기체류하려면 거소증명이라는 외국인 등록을 하여야 하고...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정도 입니다